(영해)최초의 동학혁명은 1871년 영해동학혁명이었다.

 

 

- 일시: 2023-12.16~17
- 날씨: 약간 눈을 뿌렸고 밤사이 영하 -8도로 수온주 급냉
- 몇명: 홀로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은 금강산 이후 동해안을 따라 쭉 내려오면서 태백의 매봉산에서 태백산,소백산 방향으로 휘어져 지리산으로 이어집니다.백두대간이 내륙으로 방향을 틀기 전,분기점인 태백의 매봉산에서 그대로 동해를 따라 내려 일몰이 아름다운 부산의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산맥이 바로 낙동정맥입니다.동해안 근처는 산능선 때문에 평야가 형성되기 어려운데,183.7M 상대산 관어대 아래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더 넓은 평야지대가 보입니다.우측에는 동해바닷가 명사이십리 모래백사장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위쪽 건너편은 칠보산이 자리잡았습니다.상대산 관어대가 자리잡은 곳이 영해면인데 이 곳 아래는 송천이라는 하천이 흐릅니다.

농사를 짓는 조건으로 민물이 필요하고 관개수로의 물을 송천이 담당합니다. 바닷물은 삼투압으로 인해 작물이 말라죽습니다.송천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보림리에서 하천이 시작되어 대체로 남동쪽으로 구불거리며 흐릅니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천리·오촌리·미곡리·가산리를 지나고, 영해면 원구리, 병곡면 연평리·송천리, 영해면 괴시리·대진리 등지를 통과하여 대진해수욕장 근처의 고래불대교 아래에서 바다로 빠져나갑니다. 송천으로 흘러들어 오는 지류들은 석문천·울령천·남천입니다.

동해바다,칠보산,송천 안쪽은 전부 평야지대로 송천들,원황들,거무역들,덕천들이 펼쳐집니다.이렇게 농사짓는 땅이 넓으면 먹거리 생산이 풍부해서 부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몇 곳을 둘러보니 가문의 종택들이 즐비했고 기품있는 고래등 기와집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전쟁을 하든 혁명을 하든 군자금이 필요합니다.1871년 3월 10일 영해에서 교조신원을 기치로 영해부 관아를 습격하고 영해부사 이 정을 처단한 역사적 사건을 보면 도올의 말대로 혁명은 "점"이 아니라 "면"이라고 보았을때 갑오동학혁명도 결국 1871년 영해동학혁명과 맞닿아 있습니다.당시 영해부사 이정은 생일잔치에 대소 민인을 초치하여 떡국 한 사발에 30금을 받을 정도로 수탈을 자행했던 자였습니다.동학혁명은 한 시점의 사건(event)이 아니라 과정(process)으로 보면 됩니다.동학은 인간 삶의 총체적 개벽을 요구한 철리를 주창했고,인본위의 인류사의 비전을 제시한 점을 크게 보아야 하는데 영해,영덕이야말로 실제적 동학의 산실입니다.

 

이필제를 중심으로 동학도 600여명이 영해 우정골의 형제봉 병풍바위에 집결해 천제를 지내고 당시 영해 관아를 습격해 영해부사를 처단했습니다. 이로써 3월 21일 안동의 국청에서  동학도들은 심문과 고문을 당하고 6월 24일 형량이 결정되었는데 자진자(自盡者) 1명,가혹한 심문으로 사망한 12명,목이 잘린 효수자 29명,중형·정배가 21명 등 63명을 포함해 동학도 수백 명이 참사를 당했습니다. 영해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예향이자 문향이고 그 중심에는 이색과 관어대가 있습니다만 이렇게 동학영해혁명도 있습니다."이필제의 난,영해농민의 난"이 아니라 1871년 최초의 동학혁명으로서 영해동학혁명으로 고쳐져 불리우는 날이 머지 않아 올겁니다.

현재는 영덕군 영해면이니 영덕의 중부에 있는 곳이 영해(寧海)면입니다. 지금은 영해가 영덕의 일부로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시기 신돌석장군을 비롯한 항일투쟁으로 영해를 역향으로 보고 영해를 영덕군의 일부로 축소했다고 합니다.

영해寧海를 순우리말로 바꾸면 "안녕바다"가 되는데 생뚱맞게 "별빛이 내린다"를 부른 가수 안녕바다가 떠오릅니다.일본의 개입으로 1894년 동학혁명은 좌절되었지만 동학혁명은 대한민국의 역사상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들이 추구한 평등한 세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학혁명은 영해 동학혁명으로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보다는 23년 빠른 초창기 혁명이었습니다.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은 도망을 가서 죽이지도 못했지만 영해 동학혁명에서는 영해부사 이정을 처단했습니다. 조병갑과 이정의 공통점은 전라도와 영해의 곡창지대의 탐관오리였습니다.그 당시 백성의 대부분이 농민이었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으로 불리지만 사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농민을 빼고 동학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 답사일정(風輪) :490km

 

관어대-영해부관아 책방-영해읍성-창수초등학교 인천분교장-석문바위-인량2리마을(갈암종택,애국지사함양박공3의사비)

 

2023-12-16

 

본가에 가서 부친과 저녁을 한 후 출발하여 밤 11시쯤 관어대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관어대 주차장: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608

 

상대산 정상의 관어대는 불을 켜 빛나고 있었습니다.영하 -6도에서 새벽녘에는 영하-10도 수준으로 수온주가 하락했고 강풍이 불어 차가 기우뚱하기도 했습니다. 

 

 

(1박)

 

 

2023-12-17

 

완전무장을 했지만 사진을 찍다보니 손이 시렵고 얼굴이 얼어붙는 느낌입니다.그래도 한발짝 한발짝 움직이니 혈기가 도는 것을 느낍니다.동해바다와 평야 사이 문필봉처럼 솟은 곳이라 바람이 가중되어 체감온도를 더 낮춥니다.

관어대 조금 못미쳐 "아름다운 전망대"라는 곳이 있어서 영해송천평야를 내려다봅니다.바로 앞은 송천이 흐르고 있습니다.덕천리 마을이 보이고 솔 숲 너머가 덕천들입니다.상대산 그림자가 뾰족하게 보이는 곳입니다.덕천들 바로위는 원황들이고 우측 위 칠보산 앞쪽이 거무역들입니다.

 

동해바다 명사이십리를 이어가는 해수욕장은 송천 근처의 대진해수욕장과 그 위로 덕천해수욕장,고래불해수욕장,영리해수욕장으로 이어지고 앞에 보이는 산은 칠보산입니다.



 

목은 이색의  관어대부를 보면 관어대 명칭은  "노는 고기를 가히 셀만하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라고 합니다.제눈에는 물고기가 안보이지만 목은 이색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닐것이고 아마도 그 당시만해도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모습(관어대부에 보면 고래도 등장합니다.)이 자주 보였든지, 아니면 현재의 관어대 자리가 아닌 물가에 더 가까운 아래쪽이 관어대였을 수도 있습니다.이색의 외가는 영해라고 되어있고 관어대에서 보면 지난번 다녀 온 목은이색유적지까지는 4.2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목은 이색의 관어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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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어대부서(觀魚臺賦序)-목은 이색

관어대재영해부 임동해석암하 유어가수 고이명지 부오외가야 위작소부 서기전지중원이(觀魚臺在寧海府 臨東海石巖下 遊魚可數 故以名之 府吾外家也 爲作小賦 庶幾傳之中原耳)[관어대는 영해부에 있다. 동해 바위 아래를 내려다보면 노는 고기를 가히 셀만하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영해는 나의 외가이며 이를 위하여 작은 부를 지어 중원에 전해지기를 바란다.]

 

단양동안(丹陽東岸)[단양 동쪽 해안]

일본서애(日本西涯)[일본 서편 물가에]

홍도묘묘(洪濤淼淼)[큰 물결이 아득하여]

막지기타(莫知其他)[딴 것이 보이지 않네]

기동야여산지퇴(其動也如山之頹)[움직이면 태산이 무너지는 듯]

기정야여경지마(其靜也如鏡之磨)[고요하면 간 거울인듯]

풍백지소탁약(風伯之所橐鑰)[풍백이 풀무질을 하는 곳]

해약지소실가(海若之所室家)[해신이 거처하는 집]

장경군희이세요대공(長鯨群戲而勢搖大空)[큰 고래가 떼 지어 희롱하면 하늘이 흔들리고]

지조고비이영접낙하(鷙鳥孤飛而影接落霞)[사나운 새가 혼자 날면 그림자가 노을에 닿네]

유대부언(有臺俯焉)[그것을 굽어보는 이 대]

목중무지(目中無地)[눈 아래 땅이 없다]

상유일천(上有一天)[위에는 한 하늘]

하유일천(下有一水)[밑에는 한 물]

망망기한(茫茫其閒)[망망한 그 사이]

천리만리(千里萬里)[천리인가, 만리인가]

유대지하(惟臺之下)[대 밑에는 ]

파복불기(波伏不起)[물결이 잔잔]

부견군어(俯見群魚)[고기들을 내려다보니]

유동유이(有同有異)[같은 놈, 다른 놈들]

어어양양(圉圉洋洋)[어릿어릿대고 꼬리치며]

각득기지(各得其志)[제각기 만족하네]

임공지이과의(任公之餌夸矣)[임공의 미끼는 엄청나니]

비오지소감의(非吾之所敢擬)[내가 감히 엄두도 못 낼 것]

태공지조직의(太公之釣直矣)[태공의 낚시는 곧았으니]

비오지소감기(非吾之所敢兾)[내가 바라지도 못할 것]

차부아인(嗟夫我人)[아아, 우리 사람은]

만물지령(萬物之靈)[만물의 영장으로]

망오형이락기락(忘吾形以樂其樂)[내 몸도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낙기락이몰오영(樂其樂以殁吾寧)[그 즐거움을 즐기다가 편안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더라]

물아일심(物我一心)[외물과 내가 한마음이요]

고금일리(古今一理)[예와 이제가 한 이치라]

숙구복지영영(孰口腹之營營)[뉘라서 구복에 영영하여]

이감군자지소기(而甘君子之所棄)[군자의 버리는 바 되겠는가]

개문왕지기몰(慨文王之旣歿)[슬프다, 문왕이 이미 가셨으매]

상어인이난기(想於牣而難跂)[뜀 가득을 생각하나 발돋움하여 볼 길 없고]

사부자이병부(使夫子而秉桴)[공자께서 떼를 타고 오시면]

역필유락우차(亦必有樂于此)[또한 이것을 즐기시리]

유어약지단장(惟魚躍之斷章)[더구나 어약의 구절은]

내중용지대지(迺中庸之大旨)[중용의 대지이니]

서침잠이종신(庶沈潛以終身)[종신토록 그 뜻에 잠겨서]

행구의어자사자(幸摳衣於子思子)[자사님을 스승으로 받들리라]

 



 

 

관어대 누각 내에는 몇개의 한시가 보입니다.그 중 표은 김시온의 한시도 있습니다.
아래 한시는 관어대 내부의 편액과는 다른 한시입니다.

夢登觀魚臺(몽등관어대) : 꿈에 관어대에 올라 -표은 김시온


늙은 신선이 큰 바다를 뛰어넘네 老仙超大海(노선초대해)

그 신선 방호산을 양쪽 옆구리에 꼈네 兩腋挾方壺(양액협방호)

눈앞에 해가 지고 달이 다시 떠오르고 日月前呑吐(일월전탄토)

하늘과 땅 밖에는 아무것도 뵈지 않네 乾坤外有無(건곤외유무)

물속에 잠긴 자라를 하필이면 낚을 건가 鰲潛何必釣(오잠하필조)

요동을 치는 고래, 저놈을 잡아야지 鯨動此堪誅(경동차감주)

길게 휘파람 불며 푸른 허공 기대서니 長嘯倚空碧(장소의공벽)

힘차고 시원한 바람 사방에서 불어오네 雄風生四隅(웅풍생사우)


(필사)

표은 김시온(1598∼1669) 그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침략자 청나라와 맞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하고 있는데, 인조가 이미 무릎을 꿇었다는 비통한 소식이 들려와 통곡을 하며 돌아와서, 세상에 대한 꿈을 접었다고합니다.1644년 마침내 명나라가 멸망하자, 스스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부르면서 첩첩 산 첩첩 골에 초당을 짓고 학문과 강학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

 

▷영해부 관아 책방

영해성내리책방관사(盈德城內里冊房官舍)만 복원해 놓았습니다.여기서 책방冊房 은 요즘의 서점 혹은 도서관으로 오해 할 수도 있지만 책방은 영해부사 보좌역으로 지금으로 치면 자치단체장의 비서실장 정도 됩니다.

영해부관아 뒤쪽 담벼락이 바로 현재 남아있는 영해읍성의 흔적입니다. 바로 옆이 현재 영해면사무소인데 영해면 사무소의 축대의 모서리를 살펴보면 일본 왜성의 축성 방법과 똑 같습니다. 아마 일제강점기 시절 손을 본 것 같습니다.

 

영해읍성의 서쪽 성벽 일부입니다.

▷창수초등학교 인천분교장:창수면 인천리 47-1

과거 인계서원 자리로 추정됩니다.인계서원은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입니다.인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습니다. 

바로 옆에 석문바위가 있습니다.함양박씨 박하선과 관련된 곳이 이 곳 주위로 보고 동학을 수용하여 동학의 하부구조를 만든 곳으로 본다고 합니다.도올은 동학혁명의 산파로서 박하선(朴夏善: 영해 인천리의 유학자)과 강수(姜洙, 혹은 姜士元:영덕 거천리<현재 지명 직천리>의 지식인) 두 사람을 주목해야한다고 합니다.

영해는 동학 포교의 전진기지였습니다.초기 동학은 경주를 중심으로 동북지역과 동남지역인 동해안으로 확산이 되었고 영해 지역에 수운 최제우가 동학의 시천주 사상을 포교한 것은 1861년부터였습니다. 이해 11월 박하선이 영해지역 최초 접주로 임명될 정도로 동학이 전파되어 교세가 불어났고 이러한 동학 세력의 확장은 1871년 동학 거사의 시발점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보아 집니다.
 

1871년 동학 거사는 이러한 동학의 확산 분위기 등으로 인적, 물적 지원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해거사시 가장 많은 수의 동학도가 참여했고, 지도부는 대개 신향 출신들이었고 핵심주도 인물인 초대 접주 박하선은 수운 최제우가 대구에서 처형당하자 시신을 모시고 경주 용담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최시형보다 앞서 거론되었고 박하선의 지도력과 활동으로 영해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그는 동학 포교로 관에 지목되어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1869년 말 사망했다고 알려졌습니다.그의 아들 박사헌은 영해 거사의 장소 제공 등 물심양면으로 거사를 지원하고 이끌었습니다. 강수는 최시형과 끝까지 함께 하여 동학 경전을 펴내는 등 동학 발전에 공이 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풍류는 접화군생(接化群生)에서 보듯이 조화를 중시합니다.그래서 군생, 즉 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풍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 동학이라고 보면 동학 역시 서얼을 천시하고 갈라치기하는 것을 없애고 평등을 추구하며 근본적으로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인내천 사상으로 최제우가 동학을 만든 이유일겁니다. 요즘도 갈라치기를 정치적 전략으로 보고 실행하는 것을 봅니다만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짓인지 알 수 있습니다.북한이 망하는 이유는 백두혈통,출신성분을 따지는 갈라치기에 있고 현재의 대한민국이 이상해진 것도 유독 검찰출신을 따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량2리 마을

 

인량2리 마을을 보면 소호종택(함양박씨),갈암종택,우계종택,청오당(무안박씨종택),오봉종택(안동권씨),신안주씨종택 등 종택만 6곳입니다.

갈암 이현일은 조선 숙종때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했고 갈암의 8대손 이수악과 9대손 이회발이 항일투쟁의 거점으로 활용된 역사성이 있는 종택입니다.

 

애국지사 함양박공 의연,의열,의훈 사적비가 있는데 20대 전후의 나이에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의 바친 세분 선열의 항일투쟁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박의연은 신돌석장군 의병진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동학영해혁명은 이필제 이외 박하선,강수 등이 있었음을 기억해야하고 앞으로  이를 기리는 것이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1871년에 일어난 영해동학혁명은 동학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부패한 정치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일어난 농민들의 저항이었습니다.영해동학혁명은 동학농민군이 처음으로 관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로, 이후 동학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비판하고, 백성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계기가 되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영해동학혁명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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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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